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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나무의 철학_로베르 뒤마

by Ocean 크루저 2021. 12. 27.

나무의 철학 - 로베르 뒤마(동문선)

P132

만일 데카르트가 나무의 영상에 어떤 철학적 의미를 부여했다고 한다면, 그가 가까이서 읽었던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에게서 그 개념들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철학자는 인식의 총체를 연역하기 위한 이리환으로 교목성의 계획을 제시하였다. 달랑베르는 <백과전서>의 서문에 나타난 베이컨의 인식 체계를 떠올리고 있는데, 그는 사물과 지식의 구조들을 동시에 연결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이어서 베이컨은 <백과전서>의 세 가지라고 할 것들, 역사 ·시 ·철학이 기억 ·상상 ·이성과 같은 인간의 세 가지 이해력 속에서 발원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데카르트를 중개로 하여 베이컨에서 <백과전서>에 이르는 도정을 통해 백과사전적 나무가 논리학 나무에 접목되고 질적으로 변화되는 사실을 주목하는 일이 흥미롭다. 사물의 질서는 고대의 우주가 그것을 조직했었던 그대로 정연한 오체에 관한 플라톤의 이론을 지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칼라 우주를 지나서, 공간과 시간의 무한한 거리를 재발견하는 것으로 무너진다. 지식의 질서는 고전 시대에서 무한한 존재로 이어가는 듯한 인식의 성장 효과 아래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인식의 증대에 결부된 사물과 세상의 현기증 나는 번식은 인간의 정신을 혼란과 낙담 속에 빠뜨릴 수 있다. 코이레는 몽테뉴의 회의주의에서 데카르트의 자발적인 한정에 이르는 자세들을 예민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혼란스러운 과다의 장애를 피해 가기 위해서는 질서를 잡는 일이, 말하자면 분류하고, 분배하며, 계급을 매기고, 조직하는 일이 필요하다. 다른 식으로 말해서 백과사전적 나무를 살리는 수액, 정신의 힘을 떠날 필요가 있다. 나무의 정신은 무한정 자라난다. 중심과 뿌리로 자신들을 튼튼하게 하면서. 이러한 백과사전적 나무의 영상은 인간의 정신에 언제나 과도적인 세상의 무한한 다양성을 이해하고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을 실현한다. 베이컨 ·데카르트 ·달랑베르가 나무라는 저 식물적 존재의 물리칠 수 없는 일관성에 사로잡혔던 것처럼, 나무는 견고하게 조직을 갖추고서 소멸하는 모든 것들 한가운데서 저항하는 능력을 보여 준다. 알아야 할 우주의 예외적인 팽창에 직면하여서, 근본적인 변화는 "정신이 (···) 자신의 현존을 느끼는 이러한 새로운 힘에 관한 자각을 하는 데서 가능하다. 모든 팽창의 증대는 비옥하게 남아 있을 것이며, 정신이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을 향한 새로운 강렬성을 선취하지 않는 한 마침내는 공허에 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같은 집중만이 자신만의 고유하고 가치 있는 모든 특성 속에 사실을 확고하게 해 줄 것이다. 고도의 힘, 가장 심오한 진실은 무한으로 넘어가는 힘 속에서 거주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무한에 직면하여 자신을 확고히 하며, 존재의 무한성에 자신의 단순한 통일성을 똑같은 자격으로 보여주는 데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듯이 백과사전적 나무는 당당하게 파스칼적인 떡갈나무에 도전한다. 

 

-> 어느 곳에서도 똑같은 모양, 크기, 높이의 나무를 본적이 없다. 인간이 만들어 낸다는 분재나 조형목 또한 나무의 기본적인 특성을 살려 모양을 살리고 크기를 조절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고 역시 누구 하나 똑같을 수는 없다. 직원을 바라보는 관점을 사장의 마인드와 철학만을 강요하는 것은 지난 성장기에서의 것이 될 수 있다. 지금읜 나무의 철학과 같이 단순하 통일성을 똑같은 자격으로 (동일 선상_수평구조) 바라보는 것이 필수이다.

 

나무의 논리적 구조는 고대에서 고전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일하게 존재와 지식의 분배를 형상화할 수 있게 해주었다. 고전 시대의 식물은 테오프라스토스의 백과사전 계획을 성취하게 해 주면서 여전히 분류학적인 것으로 남는다. 그것은 식물들을 눈에 보이는 요소들로부터 출발하여 그들의 유사성과 차별성의 유희를 따라가며 분류한다. 관찰하고, 구별하고, 특징짓고, 명명하고, 분류하는 일은 18세기 중엽에 이를 때까지 자연주의자의 주요 작업들이었다. 미셸 푸코가 설명하고 있듯이 자연의 역사는 "가장 근접한 시각의 언어와 단어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간주되는 사물들"에 접근한다. 투른포르에서 앙투안 로랑 드 쥐시외에 이르는 그 도정은 놀라운 체계를 보여 주었는데, 식물적 존재들을 대조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것들을 일관성 있게 정리하였다. " 19세기 중엽에 린네의 작업은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식물학자는 잎사귀와 열매를 단순하게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나무나 식물들의 조화를 연역적으로 결론지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전례가 없는 혼란이 분류학의 아름다운 체계와 종의 기운의 이론을 황폐화시킨다. "다윈과 더불어 계통학은 분류학을 이어받는다" 그때 새로운 나무의 영상이 수립되는데, 19세기를 통해서 계통학적인 나무가 성장하고 번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유형으로 알려진 최초의 나무는 1766년 팔라스가 심었던 것이다. 체계적인 다른 자연주의자들처럼 팔라스는 살아 있는 개체들을 연속된 계열로 표현하는 방식에 관해 의심을 가진다. 그의 직접적인 말에 따르면, 집단들 속에서 점진적인 전이에 의해 서로가 관계 속에 진입하면서 나누어지는 방식을 의심하는 것이다. 1766년 출판된 저서<무척추동물에 관한 반론>에서 그는 "참다운 식충류(히드라 ·산호충 ·해면 따위의)는 '동물적 특성'이 '식물적 기질 및 습성'과 만나는 중재적인 이름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팔라스에게 자연은 그 체계에 있어서 공허로 채워졌을 뿐만 아니라 점진적으로 복잡해지는 자신(자연)의 기관을 목적과의 관계 속에서 조금씩 변화시키며 형성해 간다. 자연은 가장 단순한 구축 위에서 접목하고, 새로운 부분들로 연이어 적응한다." 살아 있는 개체들의 분배를 잘 표현하고 있는 이러한 생각은 "결국 나무에 관한 생각일 것이어서, 뿌리는 가장 단순한 조직의 존재를 나타내면서 두 개의 전혀 다른 기둥 - 식물계와 동물계 -을 탄생시킬 것이다. 이들은 분명하게 구별되지만 다양한 접촉으로 교류할 수 있다." 우리는 동물의 분포를 보여 주고 있는 기둥을 예로 택하면서 연체동물에서 어류로 넘어간다. 측면의 가지에는 곤충들을 달고, 이어서 어류에서 양서류로 넘어간다. 다른 측면의 가지에는 네발짐승에 이르기 앞서 조류들이 기둥에서 뻗어 나간다. 팔라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친화력으로 모인 일련의 유로 이루어진 주요한 계로 구성된 기둥은 잔가지 대신 여기저기 유들을 풀어놓은 것인데, 유들은 측면의 친화력으로 최초의 것들과 합류하면서 그들 사이에 끼어들 수는 없다." 만약 팔라스가 여기서 만족스러운 적절한 직관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연의 역사가 그때까지 시종일관 혼동하였던 두 종류의 관계를 ---- 한 부분은 가지의 연속성으로, 다른 한 부분은 그들의 접근이나 접촉으로 ---뚜렷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그 직관이 건네주고 있기 때문이다(···): 공통의 계통에서 유래한 관계들과 구별된 계통들에 순응하는 데서 일어나는 병행 현상의 관계들을 표현하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연의 연속성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팔라스의 나무는 계통수가 아니고, 식물계와 불활성의 무기력한 세상 사이를 오가는 전이를 보여 주기에 적합한 표현 양식에 불과하다. "유기체들은() 무기체들을 따르지 않으며, 그들은 후자와 어떠한 친화력도 갖지 아니한다. 단순하게 말해서 유기체들은 땅 위에 나무가 서 있듯이 무기체들 위에서 서로 기대고 있을 뿐이다." 참으로 문제되는 것은 영상이지 설명을 해주는 모형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 영상이란 그 위에서 가장 긍정적인 의미들이 나무들과 접목되는 그루터기이다. 이것은 흥미로운 접목이 아닐 수 없다. 살아 있는 존재들간의 불연속성을, 심지어 그 자체가 점진적으로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조하기 위해서 팔라스가 고안했던 나무가 진화의 표상격인 영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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